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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700년의 역사. 건국에서 멸망까지

by insight19702 2025. 9. 30.

#주몽(建國)

#광개토대왕(擴張)

#장수왕(南進)

#살수대첩(抗戰)

#멸망과 발해(繼承)

 

2천 년 전 만주 벌판에서 시작된 작은 부족 국가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는 훗날 동북아시아를 호령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했고, 7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찬란한 역사를 써 내려갔습니다. 바로 고구려입니다. 오늘은 고구려의 건국부터 멸망까지, 그 장대한 여정을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1. 시작과 건국

주몽, 새로운 땅에서 나라를 세우다

기원전 37, 부여에서 태어난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주몽, 훗날 동명성왕이라 불리게 될 인물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활을 잘 쏘아 명성을 얻었지만, 뛰어난 재능은 오히려 주변의 시기를 불러왔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주몽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고향을 떠나기로 한 것입니다.

압록강을 건너 낯선 땅 졸본부여에 도착한 주몽은 그곳에서 부족민들을 모아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름은 고구려. '높은 언덕에 세운 나라'라는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부족 국가에 불과했지만, 주변의 여러 집단을 통합하며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생존을 위한 투쟁

고구려의 초기는 생존 그 자체였습니다. 산악 지형은 방어에 유리했지만, 언제 중국 세력이나 주변 부족의 침입을 받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끊임없는 전투와 훈련 속에서 고구려인들의 강인한 기질이 단련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인의 이미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된 것입니다.

기마 전술은 고구려의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험준한 지형을 누비며 단련된 기마 부대는 전장에서 무서운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주몽이 세운 작은 나라가 훗날 동북아시아를 호령하는 제국으로 성장하게 될 줄, 당시 사람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위대한 제국의 씨앗은 이미 뿌려져 있었습니다.

 

2. 팽창과 전성기

체계적인 성장

고구려의 성장은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태조왕 시기에는 주변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며 영역을 크게 넓혔습니다. 단순히 땅을 차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복한 지역을 체계적으로 다스리며 '왕국'에서 '제국'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고국천왕은 왕위 세습 체제를 정비하여 왕권을 안정시켰습니다. 귀족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조율하며 국가 체제를 한층 강화했습니다. 미천왕 시기에는 오랫동안 한반도 북부를 지배해 온 낙랑군을 몰아내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드디어 고구려는 완전한 자주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광개토대왕, 천하를 호령하다

4세기 말, 고구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 군주가 등장했습니다. 바로 광개토대왕입니다. 그는 고구려의 국운을 최전성기로 이끌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정복 사업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남으로는 한반도 북부와 백제 영토를 공략했고, 동으로는 동해 연안까지 진출했습니다. 북으로는 만주 벌판과 연해주를 아우르고, 서쪽으로는 요동까지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그의 위업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고구려는 '천하를 호령하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장수왕의 남진 정책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은 아버지의 유업을 충실히 이어받았습니다. 그는 과감하게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습니다. 이는 단순한 천도가 아니라, 한반도 남부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장수왕의 남진 정책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며 한반도에서 고구려의 우위를 확고히 했습니다. 이로써 고구려는 남북으로 광활한 영토를 거느린 동아시아 최강국의 자리를 굳혔습니다.

 

문화의 꽃

이 시기 고구려의 힘은 군사력만이 아니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모두가 번영했습니다. 불교가 전래되며 사상적 기반이 풍요로워졌고, 고구려 특유의 기개가 담긴 벽화와 건축이 꽃을 피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역동적인 모습들은 바로 이 시기의 찬란한 문화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3. 도전과 균열

내부의 균열

제국의 전성기는 영원할 수 없었습니다. 내부에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귀족 세력이 강해지며 왕권이 점차 약화되었습니다. 중앙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지방 귀족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키웠고, 농민들의 부담은 점점 커졌습니다. 사회 전반에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외부의 압박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외부의 압박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끊임없이 도전해 왔고, 북쪽에서는 유목 민족의 침입이 이어졌습니다. 무엇보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수나라와 당나라의 압박이었습니다.

 

살수대첩의 영광과 그 대가

612, 수나라 양제는 무려 10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습니다. 전례 없는 규모의 침략이었습니다. 하지만 을지문덕 장군은 뛰어난 전략으로 수나라 군대를 살수로 유인했고, 그곳에서 적군을 완전히 괴멸시켰습니다. "살수에 달빛이 비치고, 강물은 붉게 물들었다"는 표현은 이 전투의 참상을 생생히 전합니다.

살수대첩은 고구려의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승리의 영광 뒤에는 지친 나라가 있었습니다. 수차례의 대규모 전쟁은 국력을 서서히 갉아먹었고, 농업 기반은 황폐해졌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나라는 쉽게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연개소문의 등장

연개소문은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일시적인 안정을 꾀했습니다. 그는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대당 항쟁을 주도했습니다. 그의 카리스마는 분명 강력했지만, 독재적 정치 방식과 권력 다툼은 오히려 내부 분열을 심화시켰습니다. 고구려는 서서히 균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4. 멸망과 유산

최후의 저항

668, 운명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안시성에서는 치열한 저항이 벌어졌습니다. 성벽이 무너질 듯 위태로웠지만, 성주와 백성들은 끝까지 싸웠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보장왕은 항복했고, 700년 가까이 이어진 고구려의 국운은 막을 내렸습니다.

 

멸망의 원인

고구려 멸망의 원인은 분명합니다. 첫째, 귀족 중심 사회의 내부 분열이었습니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들 간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면서 국가의 통합력이 무너졌습니다. 둘째, 장기간 전쟁으로 인한 국력의 고갈이었습니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끊임없는 침공을 막아내느라 나라의 힘이 바닥났습니다. 셋째, 외부 강대국과의 불리한 대립 구도였습니다. 신라와 당의 연합에 맞서 싸우기에는 이미 국력이 너무 약해져 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 요인이 겹치며 제국은 무너졌습니다.

 

사라지지 않는 정신

그러나 고구려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고구려 유민들은 만주 땅에 발해를 세워 제국의 기개를 이어갔습니다. "해동성국"이라 불린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서 자부심을 지켜나갔습니다.

고구려는 후대 한국인들에게 '패기와 자존심'의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 속의 역동적인 인물들, 거대한 성곽과 무덤, 그리고 이름만 들어도 가슴 뛰는 영웅들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연개소문. 이들의 이름 속에는 강인함과 불굴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안시성에서 끝까지 저항한 이름 없는 병사들의 용기도 잊을 수 없습니다.

 

고구려는 멸망했지만, 고구려의 정신은 영원합니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도전 정신과 굴하지 않는 기상을 일깨워 주는 소중한 유산입니다.

작은 부족 국가에서 시작해 대제국으로 성장했다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고구려. 700년의 여정은 영광과 좌절, 승리와 패배가 교차하는 인간 역사의 축소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 속에서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자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고구려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들이 보여준 도전 정신과 개척 의지, 끝까지 싸우는 불굴의 자세를 배우기 위함입니다. 고구려의 정신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입니다.

 

고구려는 역사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