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실화, 용산에서 발견된 두 발 잘린 아이 '옥가이' 사건
충격적인 보고 — "아이가 두 발을 잃었습니다"
"용산강(龍山江) 근처 무녀의 집 뒤, 언덕길 옆에서 5-6세 되는 여자아이가 두 발이 잘린 채 버려졌습니다."
"나를 업고 가면 내 발을 자른 집을 가리켜 줄 수 있어요.""그 아이를 신중히 간호해 죽지 않게 하라. 포도 부장을 불러 범인을 속히 잡으라."
아이의 증언
"한덕이 내 발을 잘랐어요"중종실록에 따르면, 이 어린 아이의 이름은 옥가이(玉加伊) 또는 **개춘(開春)**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록에서는 이것이 실제 이름인지 별칭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하층민 아동의 이름이 정확히 기록되지 않았던 관례를 고려하면 별칭일 가능성이 큽니다.의금부 관리가 물었습니다.
"누가 네 발을 자른 것이냐?"그리고 곁에서 죽을 먹이던 여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수양어머니 한덕의 반박의금부는 두 여인을 불러 대질심문을 실시했습니다. 한덕은 강력하게 부인했습니다.전문가의 소견"이것은 분명히 칼로 베어진 상처입니다."
미궁 속으로 —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조정에서는 한덕의 처형 여부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엄벌론: "증거가 명확합니다. 칼로 자른 흔적이 분명합니다."
- "최근까지 옥가이는 멀쩡히 걸어 다녔습니다."
- "옥가이는 한덕, 중덕, 귀덕의 집을 자주 오갔습니다."
- "한덕의 집에서 옥가이를 수양딸로 키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조선시대 율법의 한계당시 조선의 율법에 따르면, "80세 이후의 사람과 10세 이전 아이의 말은 사실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미해결로 끝난 사건
- 한덕일 수도 있고
- 중덕일 수도 있고
- 전혀 다른 제3자의 소행일 수도 있었습니다
중종은 2주 동안 직접 사건을 추궁했지만, 끝내 진범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한덕은 처벌받지 않았고, 이 사건은 그렇게 조선의 공식 기록 속에 '미해결 사건'으로 남았습니다.
조선시대 실록에 담긴 사회상실록은 조선 왕조 500년의 중요한 기록물로, 왕의 언행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사건과 분위기를 담고 있습니다. 중종실록에 실린 옥가이 사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기록에 불과할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조선시대 사회구조의 문제점이 응축되어 있습니다.당시 형벌 제도와 수사의 한계증거주의보다는 자백 중심의 수사 방식이 일반적이었고, 어린아이의 피해는 종종 우선순위에서 밀리곤 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옥가이 사건이 왕의 관심을 받았다는 점은 오히려 사건의 잔혹성이 그만큼 컸음을 의미합니다.
아동 학대
조선시대 아동 피해 인식과 그 한계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옥가이 사건은 명백한 아동학대 및 강력범죄로 인식됩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아동에 대한 인권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고, 법적 보호 또한 거의 전무했습니다.
- 가정 중심 사상: 가정 내부의 문제를 외부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 부모의 권리 우선: 어린이는 부모의 소유물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신분제의 영향: 하층민 아동의 생명권은 더욱 경시되었습니다
사회적 관심의 부족또한 아동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 대해 체계적인 대응 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수사 역시 미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이 직접 지시를 내려도, 실제 사건 해결에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옥가이 사건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중종시대
500년이 지난 지금, 이 사건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신분을 초월해 하층민 여아의 사건에 왕이 직접 개입했다는 점에서, 중종의 통치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행보였습니다.무녀, 생모, 수양모 등 여성들이 사건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는 당시 여성의 복잡한 사회적 위치와 가족 제도를 보여줍니다.증거보다 신분과 나이를 우선시하던 제도의 문제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법정에서 외면당한 것입니다.옥가이는 아동·여성·하층민이라는 세 가지 약자성을 모두 가진 존재였습니다. 그녀의 미해결 사건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가장 약한 이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쉽게 무시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의 해석 —
"옥가이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누가 그녀의 발을 잘랐는가?" 왜 그녀의 목소리는 끝내 들리지 않았는가?"
"왜 진실은 밝혀지지 못했는가?"
"왜 법은 가장 약한 이를 보호하지 못했는가?"
결 론
역사 속 실화가 주는 교훈중종실록 속 옥가이 사건은 단순히 과거의 범죄 기록이 아니라, 조선시대 사회 구조와 아동에 대한 인식, 형벌 체계의 한계를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실록이라는 공적 기록물 속에 남겨졌다는 사실은 이 사건의 비범함을 반증합니다.현대사회에서는 아동의 권리 보호가 법적으로 보장되고 있으며, 모든 아동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권리를 인정받습니다. 그렇기에 과거 사건을 들여다보는 일은 단순한 역사 분석을 넘어, 현재의 기준에서 사회적 성찰을 가능하게 합니다.
- 약자의 목소리를 듣는 사회: 가장 약한 이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고 보호받는 시스템
- 증거 기반 사법 체계: 신분이나 나이가 아닌 객관적 증거에 기반한 판단
- 아동 인권의 중요성: 모든 아동이 보호받고 존중받을 권리
- 역사적 성찰: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
지속적인 재조명의 필요성옥가이 사건과 같은 사례는 현재에도 역사교육 또는 범죄 심리 분석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닌, 사회적 경각심을 일깨우는 역사적 증거이기도 합니다.
참고 문헌
《중종실록》 28년 2월 16일-17일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
《조선시대 범죄사 연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려실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