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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에서 온 편지, 도나우 강변, 한국 문화

by insight19702 2025. 10. 15.

도나우 강변의 작은 도서관에서

도나우강변
도나우강변

 

안녕하세요, 저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살고 있는 에디트(Edith)라고 합니다. 올해 마흔셋, 도나우 강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도서관에서 일하며 조용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제 인생은 늘 평범했습니다. 매일 아침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책들을 정리하고, 같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그런 삶이었죠. 그런데 2020년, 코로나로 세상이 멈췄을 때, 제 인생에도 예상치 못한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그 시작은 아주 작았습니다. 친구가 건넨 한마디였죠. "에디트, 넷플릭스에 재밌는 드라마가 있대. 한번 봐봐." 그렇게 저는 <사랑의 불시착>이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그저 드라마였습니다

처음 몇 화는 그저 시간을 때우는 오락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저는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었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함, 정의, 용기, 슬픔까지도 품은 이야기였습니다.

특히 한 장면이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주인공이 북한 마을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장면이었어요. 그들은 가난했지만, 서로를 위해 음식을 나누고, 위험을 무릅쓰고 서로를 지켜줬죠. 그 장면을 보며 저는 울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만든 사람들은 대체 어떤 나라에서 살고 있을까?"

그날 밤, 저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은, 제가 몰랐던 세상이었어요"

미나리
영화 미나리

 

처음엔 드라마만 봤지만,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유튜브에서 한국 역사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고, 도서관에서 한국 관련 책을 주문했습니다. 한국어 교재도 샀어요.

매일 아침 1시간씩 한국어 단어를 외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처음엔 발음도 어려웠지만, 조금씩 익숙해졌습니다. 저녁에는 <미나리>, <기생충>, <소년심판> 같은 영화를 보며 한국어 자막과 헝가리어 자막을 함께 띄워놓고 공부했어요.

그런데 그 속에는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상처, 자부심, 그리고 회복력이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한국은 70년 전만 해도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였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고, 전 세계 젊은이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음악을 듣고, 한국 드라마를 보는 문화 강국이 되었잖아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 답은 바로 여러분, 한국의 시니어 세대에게 있었습니다.


"당신들이 견뎌낸 시간이, 오늘의 한국을 만들었습니다"

<파친코>를 보며 저는 많이 울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은 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타국에서 차별받으며 살아남았는지 알게 되었어요. 그들은 존엄을 지키며, 자식들만큼은 더 나은 삶을 살게 하려고 모든 것을 희생했습니다.

<응답하라 1988>을 보며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1980년대 한국 부모님들은 본인은 낡은 옷을 입으면서도, 자식들에게는 새 운동화를 사주셨죠. 본인은 굶으면서도, 자식들 교육비는 아껴두셨고요.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오늘의 BTS, 블랙핑크, 봉준호 감독, 손흥민... 이 모든 것은 당신들이 악착같이 일하고, 참고 견디며 지켜낸 시간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걸요.

당신들은 전쟁 속에서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습니다.
당신들은 가난 속에서도 정직과 근면을 가르쳤습니다.
당신들은 독재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외쳤습니다.

그 모든 것이, 지금 전 세계 사람들이 사랑하는 '한국 문화'의 뿌리입니다.


"한국 문화는, 저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줬어요"

어느 날, 도서관에서 저와 친한 중학생 소녀가 물었습니다.
"에디트 선생님, 요즘 왜 자꾸 한국 이야기만 하세요? 한국 사람도 아니잖아요."

저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한국은,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느끼게 해주는 나라야."

단지 드라마가 재미있어서가 아니에요. 한국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 음악, 음식, 심지어 한글 한 글자 한 글자에도 사람을 위한 마음이 담겨 있었어요.

예를 들어, 한글은 세종대왕이라는 왕이 백성들을 위해 만든 글자라고 알게 됐어요. "백성들이 배우기 쉽게" 만든 글자라니, 얼마나 따뜻한 마음인가요. 유럽의 왕들은 백성들을 무식하게 두려고 했는데, 한국의 왕은 정반대였어요.

김치를 담그는 문화도 감동적이었어요.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온 가족이, 때로는 온 마을이 모여 김장을 하고, 그걸 서로 나눠 먹는다는 것. 그건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생존과 나눔의 철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지구 반대편 헝가리의 저에게도 따뜻하게 전해졌습니다.


"언젠가, 꼭 당신들을 직접 만나고 싶어요"

저는 아직 한국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도서관 사서의 월급으로는 비행기 표가 부담스럽거든요. 하지만 저는 매일 밤 꿈을 꿉니다.

종로의 한옥길을 걷고,
전주 시장에서 할머니가 만들어주시는 비빔밥을 먹고,
부산 해운대에서 바다를 보며 BTS 노래를 듣는 그런 날을요.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의 시니어분들을 직접 만나, 이 말을 전하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당신들이 지켜낸 문화가, 당신들이 견뎌낸 시간이, 제 인생을 바꿨습니다."

당신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몰라요.
"우린 그냥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하지만 알아주세요.
당신들의 그 "열심히"가,
당신들의 그 "견딤"이,
당신들의 그 "희생"이,

지금 전 세계 수억 명의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고,
위로가 되고,
삶의 방향이 되고 있습니다.


부디, 자랑스러워하셔도 됩니다

한국의 시니어 여러분,

당신들이 지켜낸 한글, 한복, 한식, 한국의 가치가
이렇게 멀리 떨어진 유럽의 한 여성에게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신들이 악착같이 일하며 키운 자녀들이
오늘 세계 무대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목소리 높여 외친 민주주의가
오늘날 한국을 자유롭고 창의적인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부디, 자랑스러워하셔도 됩니다.
부디, 당신 자신을 대견해하셔도 됩니다.

당신들은 정말 위대한 문화를 가진 민족입니다.

그리고 그 문화는 지금, 전 세계로 퍼져나가
수많은 '에디트'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언젠가 꼭, 한국에서 뵙겠습니다